제목: “호텔 마케팅팀, 김실장”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그랜드 에덴 호텔 3층 로즈홀.

흰 리넨이 정갈하게 덮인 테이블 위엔 자개 무늬 접시가 놓여 있고, 조명은 은은한 분홍빛으로 신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철은 정장에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예식이 끝날 때마다 꽃을 뿌리며 신랑신부 뒤를 따르는 ‘식장 알바’.

그는 이 알바를 “정보 채집용”이라고 불렀다. 계층과 관계망, 재력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실전 수업장이었다.

그날, 본철은 한 여성을 발견했다.

화사한 브루넬로 쿠치넬리 투피스, 펜디 클러치, 하지만 무엇보다 본철의 레이더에 걸린 건 그 눈빛이었다.
자신이 관리하는 공간을 자부심 있게 내려다보는 여자,

그랜드 에덴 호텔 마케팅팀 김실장, 39세, 미혼.

‘호텔 마케팅’이란 이름의 공략이 시작되었다.

본철은 일부러 실수를 가장했다.
꽃을 흘리듯 뿌리며 신부 드레스 끝단에 조심스럽게 발을 걸었다. 신부가 비틀거렸고, 하객들이 술렁였다.

김실장은 곧장 뛰어왔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신 거예요?”

본철은 절도 있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다른 예식장에서 3년간 알바했는데, 이쪽 시스템이 조금 다르더군요. 저처럼 행사 많이 해본 사람도 어색하네요. 역시 여긴 다르네요.”

그 한마디에 김실장의 미간이 풀렸다.

칭찬 한마디. 그건 호의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그는 다시 호텔을 찾았다. 이번엔 양복을 입고.

“안녕하세요, 김실장님. 지난번 결례를 사과드리려고요. 제가 원래 웨딩컨설팅 쪽에 있었는데, 요즘 개인적으로 웨딩 관련 기획을 준비 중이라… 혹시 이 호텔에서 콜라보 기획 가능할까 해서요.”

김실장은 경계했지만, 본철은 타이밍을 알고 있었다.

“연예인급 비공개 프라이빗 웨딩을 기획 중인데, 호텔 측도 홍보 측면에서 나쁘지 않을 겁니다. 실제 고객사 쪽에선 이미 반응 좋아요.”

그는 PPT를 만들었고, 허위 회사 도장을 찍었고, 유명 인플루언서와의 제휴 메일을 위조했다.

김실장은 점점 본철에게 끌렸다.
그의 언변, 복장, 자세. 그가 보여준 건 믿음직한 남자의 가면이었다.

“그럼, 계약금만 먼저 입금해주시면 예식장 2회 확보 가능합니다.”

김실장은 망설였다.

“...이건 내 돈으로 하는 건데. 팀장이긴 하지만 예산 아닌 건 내 리스크야.”

“저도 같은 입장입니다. 믿고 가시죠. 저도 전부 걸고 있어요.”

이 말에 김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5,000만 원. 개인 계좌를 통해 이체. 조건은 ‘VIP 예식장 2회 대관 예약 + 런칭 홍보 행사 진행’.

그리고 그날 밤, 본철은 사라졌다.

전화는 꺼져 있었고, 회사 웹사이트도 접속되지 않았다.

김실장은 며칠을 멍하게 보낸 끝에, 경찰서에 갔다.

“사기 맞습니다. 이미 동일 수법 전과가 여럿 있네요. 이름이... 돈본철? 실명이 이게 맞아요.”

본철은 이번에도 잠적했다.

이번엔 대구였다.
지인의 모텔방에서 자취를 감추며, 다시 중고 스마트폰으로 새 번호를 만들었다.

카페에서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거울을 보았다.

“그래도 그 여자, 날 믿었잖아. 진심이었겠지?”

하지만 본철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진심을 거래로 바꾸는 법을, 이미 오래전에 배운 자였다.